경멸이 권력이 된 사회, 누가 부추기나

7년 전 동물국회를 기억하시나요?
2019년 4월 국회에서 벌어진 일로 고발된 의원이 97명입니다.
공수처법과 연동형 비례대표제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느냐를 두고 벌어진 일이었죠. 회의장 문이 막혔고,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은 자기 의원실에 갇혔고, 국회 방호과 직원들이 점거된 의안과 문을 열려고 빠루를 들었습니다.
그걸 동물국회라고 불렀습니다.
1심까지 6년 7개월이 걸렸습니다. 선고가 지난해 11월과 12월에 나왔고, 검찰이 양쪽 모두 항소하지 않기로 한 게 12월 26일입니다. 나경원 의원은 벌금 2,400만원을 받았고 의원직은 유지했습니다. 다만 일부 피고인이 항소해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0개월이 지나 올해 국정감사가 열렸습니다.
인간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10월 6일 법제사법위원회입니다.
손솔 진보당 의원이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질의하는 중에, 김태규 국민의힘 의원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부엉이바위의 진실이나 하나 만듭시다.”
부엉이바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곳입니다.
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이 받았습니다.
“인간이 되세요.”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탰습니다.
“한 번도 사람인 적이 없다.”
김태규 의원이 김용민 의원에게 되돌려줬습니다.
“부엉이바위에 긁혔어?”
서영교 법사위원장이 국회법 145조를 들어 발언권을 정지했습니다. 오후에 유감 표명을 요구했지만 김 의원은 거부했습니다.
네 마디가 연달아 오갔습니다.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식물은 아닙니다. 식물국회는 일을 못 하는 국회를 가리키는 반대쪽 말이니까요. 남는 건 동물입니다. 다만 7년 전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번엔 빠루 대신 ‘말’이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국감장이 방송국이 됐습니다
2012년에 여야가 합의해 만든 국회선진화법이란 게 있습니다. 회의를 방해할 목적으로 폭력을 쓰면 5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입니다. 500만원 이상 벌금을 받으면 5년간 선거에 나갈 수 없고요.
상대방에 대한 협박이나 폭행·감금·재물손괴는 국회 회의 방해죄가 적용될 수 있지만, 막말·욕설·조롱이나 인격 모독·비하는 원칙적으론 대상이 아닙니다.
막말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는 건 아닙니다. 국회법 146조가 의원이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다만 형벌이 아니라 징계 사유고, 징계는 여야 동수인 윤리특별위원회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위원장이 할 수 있는 게 발언권 정지였고, 그걸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말들은 몇 시간 안에 짧은 영상으로 잘려 돌아다녔습니다.
국정감사는 원래 행정부에 묻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질의 내용보다 막말 장면이 더 멀리 퍼집니다. 질의가 끝나기 전에 자막이 붙고, 그날 저녁에 조회수가 집계됩니다.
문을 부수면 97명이 고발됩니다. 말로 하면 조회수가 올라갑니다.
우리가 앓는 병
이건 국회만의 일이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말이 소통을 위한 게 아니게 됐습니다. 속이 시원해지려고, 상대를 모욕하려고, 상대의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조롱과 모욕의 수위는 점점 올라갑니다. 한 사람이 세게 말하면 다음 사람은 더 세게 말해야 조회수를 얻거든요.
국회는 그 거울입니다. 거기서 벌어지는 일은 우리 단체 대화방과 댓글창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조롱과 모욕, 집단 공격이란 병증이 문화처럼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만의 현상도 아닙니다. 70년 넘게 바다 건너에서 쌓인 연구들이 이 병증을 다른 이름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이슈는 그 설명들을 빌려 왔습니다.
첫째, 무례함은 성격이 아니라 전략일 수 있다는 것.
지나친 인격모독과 비하를 거듭하는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이나 스스로의 평판을 생각한다면 굳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편에서 돋보이려는 목적이라면 말이 됩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과장할수록 자리가 생깁니다.
둘째, 누군가 표적을 정하면 나머지가 따라 쏜다는 것.
2,200년 전 흉노의 최고 통치자 묵돌선우가 부하들을 훈련시킨 방법이 있습니다. 묵돌은 부하들에게 자신이 명적(소리 나는 화살)을 쏘는 곳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쏘도록 명령했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즉시 처형했죠. 요즘은 처형하지 않아도 따라 쏩니다. 누군가 좌표를 찍으면 집단 공격이 시작됩니다. 2,200년 전 명적의 알고리즘이 처벌에 대한 공포였다면, 2,200년이 지난 지금 온라인에서 목도되는 집단 공격의 알고리즘은 무엇일까요.
(→ [논점] 좌표 찍으면 쏴라 — 명적(鳴鏑)의 알고리즘)
셋째, 공로가 쌓이면 발언권이 된다는 것.
건강한 소통을 막고 있는 건 언어 폭력 뿐이 아닙니다.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는 발언권에 자격과 공로를 묻는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2004년 김대환 노동부 장관이 87민주화 항쟁이 노동운동만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라고 비판하자, 민주노총은 직접 논평을 게시합니다.
논평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일개 학자출신의 장관이 함부로 폄하할 일이 아니다.”
또 마지막 부분에는 다음 문장이 나옵니다.
“우선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돌아보라.”
이런 질문은 2026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이 병증은 깊어질까요
이 병증에 대해 진단한 두 가지 설명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어떤 경우에 이 병이 깊어지는가 하는 겁니다. 상대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때, 제대로 된 다음 수순은 더 들어보고 자료를 더 모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거기로 가지 않습니다. 대신 상대를 셋 중 하나로 분류합니다. 모르거나, 멍청하거나, 나쁘거나.
(→ [Perspective] “모르거나, 멍청하거나, 나쁘거나”)
위아래 붙은 목록이 그거야!
다른 하나는 어떤 자질이 부족하기에 이 병을 다스리지 못하는가 하는 겁니다. 핵심은 ‘기다리는 일’에 관한 겁니다. 애매한 상태를 지켜보고 탐색하고 선명해질 때까지 정보를 모으는 과정을 기다리지 못하면 병증이 튀어나옵니다. 1949년에 한 심리학자가 이름을 붙였고, 1962년에 다른 학자가 정의를 붙였습니다. 애매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애매함을 위협으로 받아들인다고요.
(→ [Perspective]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의 문제)
퀘스천스는 나아지는 방법을 묻고 싶습니다
조롱과 인격모독, 집단공격. 이게 좋을 게 없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가 됩니다. 그런데 고칠 방법에 대해서는 다들 포기한 상태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퀘스천스는 그 시작이 상대편을 고치는 쪽은 아니라고 봅니다.
최근에 누군가를 향한 비판에 한 번이라도 동참하신 적이 있습니까. 댓글이든 공유든 좋아요 하나든요. 그 사람이 한 일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지금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편’에서 나온 가장 센 말을 하나 떠올려 보십시오. 그 말은 누구에게 가닿기를 바라고 나온 말이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