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Forbearance’ —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선진국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똑똑한 대통령이나 높은 시민의식이 아닙니다.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 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라도 최대치까지 쓰지 않는 것.
2018년에 나온 책이 하나 있습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의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랫(Daniel Ziblatt)이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그 책에 나온 말입니다.

민주주의는 쿠데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2016년 12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이 주목받았습니다. 기고 제목은 「도널드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인가?」였고요. 후에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란 책으로 출간됩니다.
두 저자의 관찰이 이렇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붕괴는 군사쿠데타로 오지 않는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은 지도자들이 제도를 점진적으로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과정이 합법적이고, 아주 미묘합니다. 한 서평이 요약한 게 이렇습니다.
민주주의 붕괴는 사법부의 효율적 개편, 부패 척결, 민주주의를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시행되는 개혁 조치들을 통해 진행된다고요.
이런 참사를 막기 위한 가드레일은 두 가지입니다.
- 상호 관용.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가진 상대로 인정하는 것.
- 그리고 앞서 말한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입니다.
한 정치학자가 이렇게 풀었습니다.
“제도적 자제는 정치 권력을 잡았을 때 절대 그것을 100% 남김없이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대방을 몰아세울 때도 약간의 협상의 여지를 남기라는 말이다. 왜? 그래야 상대방이 정치 권력을 잡았을 때에도 협상의 여지를 남기면서 권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제도적 자제에 대해 책이 든 예가 하필 이겁니다.
“제도적 자제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도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대법원 판사를 자기 사람으로만 임명하지 않는 정치적 신중함을 말한다.”
위아래 붙은 목록이 그거야!
대법관 임명 얘기입니다. 저자들이 “역사적 선례에서 급진적으로 이탈한 규범 파괴의 비상한 사례”라 지목한 미국 사례가 있습니다. 오바마 집권 때의 일입니다.
2016년 2월 13일,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사망했습니다.
그날 몇 시간 만에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가 선언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임명은 무효로 간주하겠다, 다음 대법관은 다음 대통령이 골라야 한다고요.
3월 16일, 오바마 대통령이 메릭 갈런드를 지명했습니다. 연방항소법원 수석판사였고, 역대 지명자 중 연방 법관 경력이 가장 긴 사람이었습니다.
상원 법사위 공화당 의원 전원이 서한을 냈습니다. 다음 대통령이 취임하는 2017년 1월 20일 전까지 어떤 지명자에 대해서도 청문회를 열지 않겠다는 내용이었고요.
청문회는 끝내 안 열렸습니다. 표결도 없었고요.
2017년 1월 3일, 지명은 아무런 조치 없이 소멸됐습니다. 293일간 대법관의 공석은 방치됐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트럼프가 취임하고 열흘 뒤인 1월 31일, 닐 고서치를 지명하며 채워졌습니다. 민주당이 필리버스터로 지명을 막자 공화당이 핵옵션을 발동했습니다. 인준 기준을 60표에서 과반으로 낮춘 겁니다.
4월 7일, 54대 45로 인준됐습니다. 자리를 비워두고 버틴 쪽이 이긴 겁니다.
그리고 4년 뒤 2020년 9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대선 두 달이 채 안 남은 시점에 사망했습니다. 공화당의 이전 논리대로라면 이 공석을 채울 지명은 두 달 뒤 새로운 대통령의 몫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공화당은 그날 밤 성명을 냅니다. 당시 집권 중인 트럼프 대통령이 곧 지명할 것이며 지명자는 상원 표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요.
‘제도적 자제’가 왜 무너지느냐
여기가 이 책의 핵심입니다. 저자들의 논지가 이렇습니다.
상호 관용이 무너지면 정치인들은 자신의 제도적 권한을 최대한으로 쓰려는 유인을 갖게 된다. 정당들이 서로를 적으로 볼 때 정치 경쟁의 판돈이 극적으로 높아진다. 패배가 일상적이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아니라 완전한 재앙이 된다.
즉 지면 끝장이라고 믿을 때 자제를 깹니다.
그리고 이게 순환이 됩니다. 한쪽이 권한을 최대로 쓰면 상대는 더 확실하게 “저들은 위험하다”고 믿게 됩니다. 그럼 상대도 최대로 쓰고요.
자제는 일방적으로 지키면 손해입니다. 나는 안 하는데 상대는 하면 지니까요.
이게 지금 우리 얘기가 되는 지점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을 지금 한국에 대보면 이렇게 됩니다.
대법관 제청 전에 만나서 합의해온 26년. 그건 법이 시킨 게 아니라 제도적 자제였습니다. 법적으로는 대법원장이 혼자 제청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대통령이 제청된 사람을 거부하지 않아온 것도 자제였습니다. 헌법에 거부 권한이 적혀 있지 않지만, 임명권이 있으니 안 할 수도 있었거든요.
양쪽이 권한을 최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의 빈칸이 메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양쪽 다 최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제 국회에서 대법원장을 탄핵하면 삼권 모두가 최대치로 쓰게 됩니다. 현재 국회는 자제하고 있고요.
레비츠키와 지블랫의 처방은 자제를 회복하자는 건데, 이 처방으론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한 칼럼의 지적이 이렇습니다.
“제도는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 한다. 정치권력이 스스로 자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제는 선의에 기대는 장치입니다. 선의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요.
여쭙습니다
법이 허용하는 권한을 끝까지 쓰지 않는 것. 그걸 미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이길 수 있을 때까지만 지키는 것입니까.
그리고 하나 더. 자제는 지키는 쪽이 손해를 봅니다. 그럼 왜 지켜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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