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법부는 말하지 않는 ‘부동성 원칙’
2000년, 프랑스에서 연수하던 한국 판사가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동성 원칙이 어떻게 규정돼 있느냐고요.
그는 당황했습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거든요.

부동성 원칙이 뭐냐면
부동(不動).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프랑스어로는 inamovibilité.
내용은 한 문장입니다.
판사는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전보도, 다른 법원으로 가는 것도, 심지어 승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싫다면 안 됩니다.
위아래 붙은 목록이 그거야!
왜 이게 원칙씩이나 되느냐
판사가 소신대로 판결하려면, 그 판결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리를 옮길 수 있으면 그게 대가가 됩니다. 인사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에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습니다.
지방으로 보내는 것. 승진에서 빼는 것. 사무분담을 바꾸는 것.
어느 것도 판결에 직접 손대지 않지만 판사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가 이걸 헌법에 적었습니다. 판결에 개입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 겁니다. 개입할 수단 자체를 없앤 거죠.
그럼 승진은 어떻게 하나
여기가 오해하기 쉬운 지점입니다.
승진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인사권자가 혼자 승진을 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프랑스는 승진 심사를 하는 기구를 따로 뒀습니다. 근무 연수가 아니라 경력과 능력을 심사해서 결정하고요.
그리고 그 기구에 인사를 받는 판사들이 직접 위원으로 들어갑니다.
또 임명과 징계를 맡는 기구, 승진과 평정을 맡는 기구가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각 법원의 사무분담과 사건배당은 그 법원 판사들이 회의로 정하고요.
한 사람이 정하는 게 없습니다.
프랑스만이 아닙니다
독일은 연방제 국가라 주별로 판사를 뽑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이탈리아도 부동성 원칙을 인정합니다. 판사만이 아니라 검사에게도요.
미국,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대다수 나라가 법관 전보를 극히 제한합니다.
그럼 한국은
법이 정한 판사 정원이 3,214명입니다.
올해 2월 정기인사에서 자리를 옮긴 사람이 960명입니다. 그중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520명이고요.
한 해에 1,000명 가까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매년 반복됩니다.
승진 사다리도 있습니다. 배석판사부터 대법관까지 여덟 단계가 넘는다는 지적이 있고요.
그 인사를 대법원장이 합니다.
판사의 보직, 평정, 연임발령과 그 거부, 겸직허가, 파견근무 허가, 휴직 허가. 전부 대법원장 권한입니다. 법원조직법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법관 13명 전원을 제청하는 것도 대법원장입니다.
헌법학자 이종수 교수가 2017년「독일의 사법제도에 관한 소고 — 특히 법관인사 등 사법행정을 중심으로」란 논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개별 법관도 명예심을 지닌 인간인 이상 향후 인사에 있어서 불이익을 당하는데도 독립해서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릴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 더 아픕니다.
“그간 사법부는 설령 독립적이었을지 몰라도 개별 법관들은 독립적이지 못했다.”
사법농단이 그걸 보여줬습니다
법원장이 매년 판사들의 동향을 정리해 봉투에 담아 법원행정처장에게 전달했습니다. 사법행정을 비판하거나 부담을 준 판사들이었고요.
법원행정처는 그걸 바탕으로 문건을 만들었습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대법원 입장과 다른 하급심 판결을 낸 법관도 분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건이 다시 법원장에게 내려가 사무분담과 근무평정에 반영됐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이 부분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1심과 2심 모두요. 인사권 범위 안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니 재판에 직접 손대면 유죄가 되고, 인사로 하면 안 됩니다.
다만 부동성 원칙도 만능은 아닙니다
전보를 못 하면 무능한 판사도 그 자리에 남을 우려가 있습니다. 지역 유지와 유착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리고 인사권을 위원회에 넘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탈리아는 판사 인사를 독립기구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2019년, 그 기구의 전직 위원이 정치인들과 만나 법원장 자리를 나눠 갖고 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승진이 능력이 아니라 어느 파벌이냐로 정해졌다는 게 조사 결과였고요.
한 사람이 쥐면 제왕적이고, 위원회가 쥐면 파벌이 됩니다.
여쭙습니다.
우리는 판결에 개입하지 말라고 해왔습니다.
그런데 직접 개입할 필요없이 인사만으로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요.
우리 시스템이 사법권의 독립을 지키기에 충분합니까?
그리고 하나 더. 다른 나라는 옮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매년 1,000명을 옮깁니다.
그 차이를 우리는 뭐라고 설명해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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