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뉴스] 이 뉴스들을 잊어도 돼?

과거를 돌아보면, 잊어서는 안 될 뉴스들도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말도 안되는 폭력이 함부로 일어났습니다. 평범한 사람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무력으로 다루는 세상은 아무도 원치 않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사건을 짚습니다. 잘못된 팩트에 대한 댓글 환영합니다.

체포 뒤 법 만들어 사형…31살 언론인 조용수, 47년 뒤 무죄

1961년 군사정권이 한 신문사 사장을 체포한 뒤 새로 만든 법을 소급 적용해 사형에 처했던 사실이 재심을 통해 뒤늦게 바로잡혔습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는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체포됐습니다. 당시 민족일보는 평화통일론 등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며 군사정권과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 사장이 체포된 뒤인 같은 해 6월, 군사정권은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은 제정 이전의 행위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혁명검찰부는 조 사장이 북한을 이롭게 하는 활동을 했다며 이 법을 적용해 기소했습니다. 결국 조 사장은 같은 해 8월 사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거쳐 12월 21일 31살의 나이로 사형됐습니다. 민족일보도 폐간됐습니다. 그러나 47년이 지난 2008년 재심 법원은 조 사장에게 적용된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미 사형이 집행된 뒤였습니다.

국가가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을 먼저 체포하고, 이후 만든 법을 소급 적용해 처벌한 대표적인 사법 피해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존재하지 않던 ‘아람회’ 만들어 기소…평범한 시민들 최고 징역 10년

1981년 군사정권 시절 교사와 공무원 등 평범한 시민들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몰려 중형을 선고받은 ‘아람회 사건’입니다. 사건의 이름이 된 ‘아람’은 피고인 가운데 한 명의 딸 이름이었습니다. 지인들이 아이의 백일잔치 등에 모여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수사기관은 이들을 북한을 추종하는 비밀조직으로 규정했습니다.

당사자들은 수사받기 전까지 ‘아람회’라는 조직 이름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들은 영장 없이 연행된 뒤 장기간 불법 구금됐고, 잠을 재우지 않거나 물고문과 구타를 하는 방식으로 자백을 강요받았습니다. 검찰은 이런 진술을 토대로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고, 법원은 최고 징역 10년의 형을 선고했습니다.

이후 피해자들은 오랜 기간 해직과 감시, 전과자라는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건 발생 28년 뒤인 2009년 재심에서 법원은 핵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수사 과정에서 불법구금과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결국 친목 모임과 백일잔치가 국가가 만들어낸 ‘반국가단체 사건’으로 바뀌었던 겁니다.

무고한 소년은 10년 복역…진범 잡고도 검찰은 영장 막았다

2000년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택시기사가 흉기에 찔려 숨졌습니다. 경찰은 당시 16살이던 다방 배달원 최모 군을 범인으로 지목했고, 최 군은 경찰의 가혹행위 속에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형기를 모두 채웠습니다.

그런데 3년 뒤 다른 경찰관이 진범으로 의심되는 김모 씨를 찾아냈습니다. 김 씨와 주변인들의 진술은 실제 범행 상황과 상당 부분 일치했습니다. 경찰은 김 씨에 대한 구속수사를 추진했지만 검찰은 불구속 수사를 지휘했고, 경찰이 신청하려던 압수수색 영장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검찰은 2006년 김 씨를 무혐의 처분했습니다. 최 씨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진범으로 지목된 김 씨는 자유롭게 생활했습니다. 이후 최 씨의 재심이 진행되자 검찰은 재심 개시 결정에도 즉시항고했습니다. 당시 진범의 살인죄 공소시효는 불과 수십 일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2015년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한 이른바 ‘태완이법’이 시행되면서 시효 만료를 피했고, 최 씨는 2016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김 씨는 진범으로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국가배상 소송에서 법원은 당시 검사의 진범 불기소가 위법했다고 판단했습니다.

현대차 노조개입 증거 4년 넘게 묵혔다…공소시효 사흘 전 기소

검찰이 대기업의 노동조합 개입 정황을 보여주는 핵심 증거를 확보하고도 불기소했다가 공소시효 만료를 불과 사흘 앞두고 뒤늦게 기소했던 사실도 있습니다. 2011년 자동차 부품업체 유성기업에서는 기존 금속노조를 약화시키고 회사에 우호적인 제2노조를 키우기 위한 조직적인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검찰은 2012년 압수수색 과정에서 현대자동차 직원과 유성기업 관계자들이 주고받은 이메일과 전략회의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문건에는 제2노조 가입 목표 인원을 설정하고 실적을 점검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2013년 현대차 관계자들의 부당노동행위 혐의를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불기소했습니다. 그 사이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해고와 징계, 고소와 차별을 겪었고, 2016년 노조원 한광호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후 검찰은 2017년 기존 판단을 뒤집고 현대차 임직원 4명을 기소했습니다. 공소시효 만료 사흘 전이었습니다. 기소에 활용된 주요 자료 상당수는 검찰이 이미 2012년에 확보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검찰이 처음부터 확보한 증거를 제대로 판단했다면 수년간 이어진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민간인 불법사찰 알고도 수사 안 했다…핵심 USB 7개는 검찰에서 사라져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불법 사찰한 사건에서도 검찰의 부실·축소수사 문제가 뒤늦게 확인됐습니다. 피해자 김종익 씨는 2008년 자신의 블로그에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동영상을 올린 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사찰 대상이 됐습니다. 김 씨의 회사까지 조사와 압박을 받았고 결국 회사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 지분까지 처분했습니다. 이후 공개된 자료에서는 언론인과 민간기업 관계자 등 광범위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사찰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검찰 과거사위원회 조사 결과, 검찰은 초기 사건 수사 과정에서 불법사찰 사실을 알았거나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도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됐습니다. 2010년 사건이 공개된 뒤에도 압수수색이 늦어져 관련자들이 증거를 없앨 시간을 줬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2012년 2차 수사에서 확보된 핵심 USB 8개 가운데 7개가 대검찰청으로 넘어간 뒤 실물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과거사위는 이 과정이 수사방해에 해당할 가능성까지 제기했습니다. 실무자 일부는 처벌됐지만 청와대 등 윗선이 어디까지 개입했는지는 끝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관련 혐의의 공소시효도 수사의 벽이 됐습니다.

댓글 1

  • 참션

    31살 사형...ㅠㅠㅠ 심지어 사장이었다... 당시에도 스타트업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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