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지적한 「암살자(들)」 역사 왜곡 포인트와 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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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들)」은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등장인물 이름이 실명이 아닙니다. 범인은 문태광이고, 수사 검사는 김학수이고, 신문은 동성일보입니다. 희생된 여학생도 다른 이름으로 나옵니다. 도입부에 실화를 바탕으로 하되 구체적 사건은 일부 다르게 각색됐다는 자막이 붙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영화를 비판하는 쪽도, 옹호하는 쪽도 문태광을 문세광으로 읽습니다. 김학수를 김기춘으로 읽고요.

그래서 제기된 의문마다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영화가 옳은지를 판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기록 밖인지를 나누려는 겁니다.

나눠보니 세 종류가 나왔습니다. 기록이 영화와 어긋나는 것, 기록이 영화 쪽을 받치는 것, 그리고 양쪽 다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영화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허구를 넘어선 것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총성의 진실

언론 주장

“영화의 출발점인 ‘총성은 여섯 발인데 탄환은 네 개, 두 발이 사라졌다’는 설정부터 기록과 어긋난다. 외교사료관에 보관된 수사기록과 판결문에 따르면 문세광은 권총에 5발을 장전했고, 탄착 지점은 허벅지(오발)·연설대·불발·육 여사·태극기 순으로 기록돼 있다.” — 문화일보

영화 내용

영화에서도 총성은 여섯 발, 두 발이 사라졌다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현장 탄흔이 4개라고 표현했을 뿐 탄환에 대해선 몇 개라고 말한 바 없습니다. 왜냐면 감식반은 탄환(탄두)을 현장에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현장검증을 하기 전에 이미 청와대 경호실에서 탄두를 수거했다고 나옵니다. 문화일보가 지적한 허벅지 오발에 대해선 영화는 의심합니다. 문태광이 멀쩡히 걷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 육영수 여사를 피격한 탄환이 과연 문태광의 4발 중 하나였는지도 의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확인되는 팩트

당시 수사본부는 현장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발표했습니다. 영화에선 6발로 나옵니다.

2005년 1월 20일 경향신문은 그 7발의 배분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문세광의 총에서 나온 것은 4발. 7발의 총성 가운데 문이 쏜 4발 외에 1발은 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쐈다고 발표됐다. 나머지 2발의 주인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문세광의 탄착 순서에 불발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장전한 5발 중 하나가 불발이면 문세광의 총에서 난 소리는 4발입니다. 발표된 7발에서 4발을 빼면 3발이 남고, 경향신문은 그 셋 중 하나를 박종규로, 둘을 미규명으로 적었습니다. 사라진 탄환이 몇 개냐는 질문은 영화가 만든 질문이 아닙니다.

영화가 다룬 의문들은 2005년 주요 언론 보도에 이미 나와 있던 내용들입니다. 2005년 ‘문세광 저격사건 의혹’은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뉴스 중 하나였습니다.

시작은 1월 20일, 외교부가 1974년 외교문서를 공개하면서부터입니다. 30년 경과 원칙에 따른 정기 공개였고, 문세광 사건 관련이 15권 약 3천 쪽이었습니다.

1월 25일, SBS와 MBC가 검찰에 이 사건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고, 2월 11일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두 방송사의 청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공개 대상은 이렇습니다. 범인 검거 보고서. 문세광의 입국과 숙박 기록. 압수와 현장검증 기록. 탄환 분석 결과. 혈흔 분석 보고서. 현장 녹음 분석. 그리고 몽타주 두 장. 목격자 진술은 제외됐습니다. 문세광 본인의 진술도요.

같은 날 프레시안이 숭실대 소리공학연구팀 배명진 교수의 총성 분석을 보도했습니다. 모두 7회의 총성이 들렸고, 이 중 4회인 1·2·3·5번째는 문세광이, 나머지 3회인 4·6·7번째는 경호원들이 쏜 것이며, 4번째 총소리가 났을 때 육 여사가 쓰러졌다는 내용입니다.

같은 날 MBC 뉴스데스크가 두 꼭지를 냈습니다. 조문기 기자가 경호원 총탄 주장을, 도인태 기자가 수사 담당자들의 반박을 보도했습니다.

2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누가 육영수 여사를 쏘았는가 편을 방송했습니다. 육영수 여사를 사망하게 한 총탄이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것인지에 대한 과학적 검증과 의혹을 다뤘습니다. SBS는 3월에 후속편을 제작했습니다.

2월 14일 프레시안이 육영수 피살 사건 당시 수사본부에 참가했던 이건우 전 서울시경 감식계장의 1989년 인터뷰를 다시 꺼냈습니다. 그는 육영수 여사 사망 15주기였던 1989년 월간 「다리」 9월호 인터뷰에서 이런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 현장에서 4발의 탄흔만 확인하고 탄두는 한 개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극장 소도구 주임으로부터 청와대 경호실에서 전날 밤에 다 쓸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 육영수 여사는 절대로 문세광 총탄에 죽지 않았으며 이 사건이 숱하게 은폐되고 조작됐다.

당시 수사 담당자들은 이 내용을 전부 반박했습니다. 수사본부장이었던 김일두 변호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사하는 과정에 문세광의 총이 아닌 다른 총의 탄환에 의해 살해됐을 거라는 의문이 아예 없었다.”

어디 가서 썰 풀기 좋은 글일본에서 영화 「야스쿠니」논란은 어떻게 끝났나2008년, 일본에서도 영화 한 편이 좌우 진영을 가르는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야스쿠니(靖国)」란 123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로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오래 활동한 리 잉(李纓) 감독이 10년에 걸쳐 만든 작품입니다. 영화 자체는 야스쿠니에 대한 찬양도 비판도 없는 ...more

배후설과 은폐설

언론 주장

“극 중 기자들이 돌려보는 전문에 ‘일본 언론은 자작극으로 보도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도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 문화일보
“영화가 제목의 ‘(들)’과 결말 자막으로 암시한 정권·중앙정보부 기획설은 공개된 한·미·일 기록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 문화일보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27일 페이스북에 “‘암살자(들)’은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사건의 배후가 북한이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인 것처럼 왜곡했다”며 “영화적 상상력이 아니라 유족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패륜적 범죄”라고 썼다.” — 중앙일보

영화 내용

문화일보가 지적한 일본 언론의 자작극 보도에 대한 장면이 영화에 실제로 나옵니다. 그런데 배후가 북한이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란 암시는 영화에 정확히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중앙정보부와 경호실의 수사 방식에 대한 의심은 뚜렷합니다. 정확히 북한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한국 내 간첩 공범에 대한 의심도 지속되는데, 박철구 경사가 문태광의 공범이 서울에 위장 사무실을 오래 유지했을 거란 추정하에 추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확인되는 팩트

일본 언론이 한국 정부의 자작극 가능성을 보도했다는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문화일보 지적이 맞습니다.

다만 일본 내에 한국 수사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건 사실입니다. 미국 외교문서로 확인됩니다.

1974년 12월 27일, 주일 미국대사관이 국무부와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낸 기밀 전문입니다. 제목은 SPECIAL MUN SE KWANG INVESTIGATION, 문서번호 1974TOKYO16855. 2005년 해제됐습니다. 대사관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국 경찰 보고서, 문씨의 ‘자백’, 서울 법원의 결론과 결론이 나지 않은 일본 보고서 사이의 현저한 차이, 이 날카로운 불일치는 한국 수사의 중요한 측면들의 진위성에 대한 일본 내 광범위한 의문을 더욱 증폭시킬 것이며, 문씨의 신속한 처형이 증거 인멸을 위한 의도였다는 믿음을 강화할 것이다. 또한, 이번 사건에서 북한이나 조총련과의 연관성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한일 관계 개선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이를 빌미로 삼을 것이다.”

같은 전문에 일본 특별수사본부가 12월 25일 수사를 끝내고 오사카지검에 결과를 넘겼다는 내용도 있는데, 문세광의 사형은 이보다 닷새 전에 집행된 뒤였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문세광을 사형했습니다.

정권·중앙정보부 기획설은 공개된 한·미·일 기록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도 맞습니다. 어떤 문서에도 정권이 기획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영화에서도 정권이 기획했다고 나오지는 않습니다. 기자들이 돌려보는 전문에 일본 신문이 중정의 자작극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했다는 문구로 나올 뿐입니다.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중정입니다.

경호실과 중정이 실수와 무능을 은폐하기 위해 벌인 증거 인멸과 대통령이 자기 부인 암살에 관여하는 자작극은 전혀 다른 가설입니다.

박 전 대통령 배후설은 1974년 당시에도, 2005년에도 직접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신빙성 있는 가설이 아니었습니다. 2005년에 쏟아진 의혹은 전부 수사와 은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974년 무렵 한·미·일 세 나라의 기록은 박 전 대통령이 배후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정황을 말해줍니다.

공개된 외교문서엔 박 전 대통령이 일본에 국교 단절을 시사하는 어조로 강력 항의했고, 이를 우려한 미국이 필립 C. 하비브(Philip C. Habib) 당시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통해 한일관계가 손상되면 한국 방위도 어렵다는 취지로 전한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 기록에도 1975년 7월 11일 중의원 답변서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974년은 박 대통령 저격사건 발생 등으로 일한 쌍방의 사정이 맞지 않아 정기각료회의를 개최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 외교는 파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배후에 서서 파탄을 향해 나아갈 설계자는 없습니다.

또 하나는 1974년 11월 29일 리처드 스나이더(Richard Sneider) 주한 미국대사가 하비브 차관보에게 보낸 서한입니다. 닷새 전인 11월 24일 한양골프장에서 박 전 대통령과 골프를 치고 만찬을 한 자리를 두고, 스나이더와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가 기억을 모아 작성한 대화 기록(memorandum of conversation)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아래 두 대목은 그 대화 기록에 있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많은 사람이 그(박정희)에게 권력에서 물러나라고 제안했으며, 아내가 살해된 뒤 100일 동안 그런 조언을 받아들였더라면 아내가 아직 살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슬프게 되돌아봤다고 말했다.”

이 서한의 마지막 두 문장이 박 전 대통령 주변의 비굴함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아마 그(박정희)의 문제를 보여주는 징후는 골프 경기와 만찬 내내 대화가 사실상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국방장관을 비롯한 참석한 한국인들은 거의 아부에 가까운 몇 마디 발언을 하는 데 그쳤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인물들은 국방장관 서(徐, 서종철 추정), 중앙정보부장 신(申, 신직수 추정),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 육군참모총장, 그리고 새로운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이었습니다. 차지철이 앉아 있던 자리는 8월 15일 사건으로 박종규가 물러난 자리입니다.

경호 관련 장면

언론 주장

“내용은 더 기가 막히다. 있지도 않았던 사실로 계속 박정희 정부의 자작극으로 몰아간다. 가령, 청와대 경호계장은 경호지침이 바뀌었다며 억지로 문태광을 들여보내고, 기자 등의 전언으로 “육 여사님이 오늘 행사에 참석하기 싫어했다더라”거나 “행사 직전 방탄 연설대로 바꿨다”며 자작극에 힘을 싣는다.”—중앙일보

“저격 직전 경호팀이 식장을 빠져나가는 장면도 사실과 다르다.”—문화일보

영화 내용

언론이 지적한 장면이 영화에 그대로 나옵니다. 다만 경호 지침이 바뀐 건 사건 당일이 아닙니다. 이전에 외교관 부인이 비표 없이 행사에 입장하는 걸 경찰이 막은 뒤 항의가 들어와 수정된 것으로 설명됩니다. 중앙일보 칼럼에는 이 설명이 빠져 있습니다.

또 저격 직전 경호팀이 식장을 빠져나가는 장면은 영화에 나오지만, 이후 대응 사격 장면에도 경호팀이 등장합니다. 전부 나간 것이 아니라 일부가 나간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확인되는 팩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후 10시 3분 경 문세광은 입장이 허가된 비표도 없었지만 일본어를 구사하며 VIP로 행세해 별다른 제지도 받지 않은 채 남측 후문을 통해 식장 내에 입장하는 데 성공했다.”

문세광이 당일 출입증 없이 들어간 건 기록입니다. 제지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기록입니다.

경찰이 막았는데 경호처가 지시해서 들여보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소극적 허점과 적극적 지시는 다릅니다. 앞쪽은 무능이고 뒤쪽은 공모입니다.

저격 직전 경호팀이 식장을 일부 빠져나갔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기록도 찾지 못했습니다. 문화일보는 사실과 다르다고 단정했지만 무엇이 사실이고 어디에 근거했는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연설대가 방탄이었는지, 행사 직전에 바꿨는지에 관한 공식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육 여사가 참석을 꺼렸다는 공식 기록도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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