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로버트 프랭크 —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하이에크는 정의를 빼자고 했습니다
앞 글에서 봤듯이 하이에크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시장의 결과는 누가 의도해서 만든 게 아니니 정의롭다 부당하다를 말할 대상이 아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AI 수요 폭발을 누가 설계했겠습니까.
그런데 같은 관찰에서 정반대 결론을 낸 사람이 있습니다.
로버트 프랭크(Robert H. Frank)
코넬대 경제학과 교수입니다. 벤 버냉키(Ben Shalom Bernanke)와 함께 쓴 『프랭크 버냉키 경제학(Principles of Economics)』 으로도 유명하고요.
1995년에 『승자독식사회』를 공저했고, 2016년에 『Success and Luck: Good Fortune and the Myth of Meritocracy』를 썼습니다. 한국어판 제목이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입니다.
부제를 보세요. Myth of Meritocracy(능력주의의 신화). 하이에크가 사회적 정의를 신기루라 불렀다면, 프랭크는 능력주의를 신화라고 부릅니다.
둘 다 같은 걸 관찰했습니다
시장의 결과는 개인의 공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하이에크는 여기서 이렇게 갑니다. 그러니 결과를 정의의 잣대로 평가하지 마라. 시장은 공로를 재는 기계가 아니다.
프랭크는 이렇게 갑니다. 그러니 그 결과를 당연한 내 몫이라고 주장하지도 마라.
같은 전제, 다른 결론입니다.
프랭크의 첫 번째 주장
승자독식 시장에서는 운의 역할이 커집니다.
실력 차이가 아주 작아도 결과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진다는 거죠. 그리고 정보화로 시장이 전 세계로 통합되면서 이 현상이 심해졌습니다.
이 논지를 삼성에 대보면 이렇게 됩니다.
DS 직원과 DX 직원의 능력 차이가 100배일 리 없습니다. 같은 회사에 같은 방식으로 입사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보상은 100배 차이가 났습니다.
왜냐면 AI 수요가 메모리로 몰렸고, DS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차이가 거대한 격차로 증폭된 거죠.
프랭크의 언어로 말하면, 이건 성과주의가 아니라 승자독식입니다.
두 번째 주장이 더 아픕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기 운을 과소평가합니다.
프랭크는 이유까지 설명해요. 우리는 자기가 겪은 어려움은 생생히 기억하는데, 도움이 됐던 우연은 잘 기억 못 합니다. 밤새운 날은 기억나는데, 마침 그 시기에 시장이 열렸다는 건 안 떠오르죠.
그래서 성공 서사가 노력 위주로 구성됩니다.
2023년 DS 부문은 15조 원 손실을 냈고 성과급은 0%였습니다. 같은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서 일했는데요.
그때 실력이 없었던 게 아니듯, 지금 223배 늘어난 게 실력 때문만도 아닐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진짜입니다
프랭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운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면 공공투자에 미온적이 된다는 것.
논리가 이렇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증세를 꺼리는 건 자기가 실력으로 성공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행운 중 하나라면, 그 환경을 유지할 세금을 거부하는 태도야말로 우리 모두의 행운을 갉아먹는 것이다.
이 대목이 [논점] 국책사업으로 발생한 초과수익, 누구에게 선취권이 있는가? 와 정면으로 이어집니다.
세액공제 6조 5천억. 국가산업단지. 전력망 55조. 관세 협상.
프랭크가 말한 “좋은 환경”이 이겁니다. 그리고 그 환경을 국가가 만들었고요.
그럼 이런 질문이 성립합니다. 그 환경에서 얻은 성과를 순수한 성과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하이에크라면 이렇게 반박할 겁니다
운이 작용한다는 건 나도 안다. 내가 평생 한 말이 그거다. 그런데 그게 운을 빼고 분배해야 할 근거가 되진 않는다.
누구의 몫이 얼마여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걸 판단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권력이 생기고, 그 권력이 자유를 잠식한다.
이게 하이에크의 논지입니다.
그리고 프랭크의 주장엔 실제로 약점이 있습니다.
운의 크기를 어떻게 잽니까. DS 성과의 몇 퍼센트가 운이고 몇 퍼센트가 실력입니까. 프랭크는 그 계산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운이 섞였다는 이유로 몫을 줄이기 시작하면, 그 기준을 정하는 사람이 새로운 권력이 됩니다.
그럼 어느 쪽입니까
프랭크가 이 사건을 봤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DS 직원들은 받을 자격이 있다. 다만 그 보상의 상당 부분이 운의 몫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그 운을 만든 조건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하이에크는 이렇게 말했을 거고요.
받을 자격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물어야 할 건 그 결과가 어떤 규칙에서 나왔느냐다.
여쭙습니다.
당신이 지금 받는 보상 중에 운의 몫은 얼마나 됩니까.
그리고 그 답이 “꽤 된다”라면, 그다음엔 뭘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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