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ive] 하이에크,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는 빼고 말합시다’

노조의 성과급 투쟁은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한동안 정의의 냄새가 났습니다

삼성전자 노조가 깃발을 들었을 때, 그림이 익숙했습니다. 거대한 회사와 그에 맞서는 노동자.

여기에 사회적 정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습니다. 나눠야 한다, 몫을 되찾아야 한다, 일한 사람이 받아야 한다.

그럴듯했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합니다

정의를 말하던 자리에서 비정규직 얘기는 안 나왔습니다.

협력사 직원들과도 성과를 나눠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노조 위원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정규직은 공부도 많이 한 분들이고, 입사할 때 채용 조건이 달랐는데, 일률적으로 같은 선에서 봐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청 노조가 원하면 직접 교섭하면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DX 5만 명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합원 자격을 DS 부문으로 한정하는 규약 개정안이 투표에 부쳐져 있습니다.

정의가 민주적으로 넓어지는 게 아니라 좁아지는 방향으로 갔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9월 3일, 정부가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은 교섭 대상도 쟁의 대상도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9월 8일엔 장관이 그 파업이 불법이었다고 했고요.

앞으로 다른 노동자들은 같은 요구를 파업으로 밀어붙일 수 없게 됐습니다.

정의를 위한 싸움이었다면 여기서 분노해야 합니다. 뒤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막혔으니까요.

그런데 조용합니다.

이미 받았거든요.

하이에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평생 한 얘기가 이거였거든요.

사회적 정의는 신기루다.

잠깐 하이에크를 소개하겠습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1899년 빈에서 태어나 1992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난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입니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고요.

평생 그가 붙들고 있던 건 계획이냐 자유냐의 문제였어요. 2차대전 중에 쓴 『노예의 길』(1944)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계획경제가 어떻게 전체주의로 가는지를 다룬 책인데, 당시엔 시대를 거스르는 주장이었습니다. 케인스가 대세였고, 계획이 곧 진보라고 여겨지던 때였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가장 집요하게 공격한 개념이 사회적 정의였습니다. 『법, 입법, 자유』 2권의 부제가 아예 「사회적 정의의 신기루」입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정의는 사람의 행위에 붙는 말이다. 누가 약속을 어겼다, 누가 남의 것을 빼앗았다. 이런 건 정의를 따질 수 있다.

그런데 시장의 결과는 누가 의도해서 만든 게 아니다. 수많은 사람의 선택이 겹쳐서 나온 거지, 설계자가 없다. 설계자가 없는 결과에 정의롭다거나 부당하다고 말하는 건 날씨를 두고 부당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신기루라는 겁니다. 있는 것 같은데 가서 보면 없는 것.

그리고 한 발 더 나갔습니다. 사회적 정의라는 말은 대개 자기 몫을 늘리려는 요구에 도덕의 외투를 입힌 것이라고요.

그러니 이 사건을 두고 “정의를 내걸더니 자기들만 챙겼다”고 분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이에크가 보기엔 처음부터 그런 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하이에크에 따르면, 노조는 그래도 됩니다

『자유헌정론』 18장에서 그가 쓴 문장이 이렇습니다.

“노조가 더 높은 임금을 확보하려 애쓰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은, 그 노력을 성공시키는 데 필요해 보이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돼왔다.”

앞부분을 보세요. 높은 임금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고 인정합니다. 노조는 자발적 결사이고, 단체로 교섭하는 건 계약의 자유에 속하니까요.

비정규직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도, 하이에크 기준으론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자기 조합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노조의 일이거든요.

정의를 내걸지만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가 문제 삼은 건 다른 겁니다

하이에크가 문제 삼은 건 ‘강제’입니다.

하이에크가 지목한 건 노조에만 주어진 법적 면책이었습니다. 손해배상 책임에서 벗어나 있으니, 사용자를 그리고 때로는 원치 않는 노동자까지 강제할 힘이 생긴다는 것.

1984년 글에선 더 직설적입니다. 지금의 노조는 숙련 노동자에게 가입과 굶주림 중 하나를 고르게 할 뿐이며, 비조합원을 일자리에서 배제함으로써만 특정 집단의 임금을 자유시장 수준 이상으로 올릴 수 있다고 썼습니다.

정의냐 아니냐가 아니라, 강제냐 아니냐. 그게 그의 잣대였습니다.

그럼 정의 대신 뭘 봅니까

하이에크가 강조하는 건 규칙입니다.

결과가 정의로운지 묻지 말고, 그 결과가 미리 알려진 일반적 규칙에서 나왔는지 보라는 것. 하이에크가 평생 주장한 법의 지배가 이겁니다.

이 기준을 이번 사건에 대보면 재밌어집니다.

노조. 파업을 무기로 관철했습니다. 하이에크가 말한 강제 요소가 있습니다.

주주. 형사 고발로 이미 이뤄진 합의를 뒤집으려 합니다. 소급 적용 문제와 닿습니다.

정부. 7월에 중재했고, 9월에 지침을 냈고, 그다음 그 파업이 불법이었다고 했습니다. 규칙이 없는 상태에서 개입했다가 나중에 규칙을 만든 겁니다. 그리고 그 지침은 법도 아닙니다.

셋 다 걸립니다. 하이에크 하나 데려왔는데 한 명도 안 빠져나갑니다.

다만 하이에크에게도 구멍이 있습니다

그는 국가의 강제와 노조의 강제는 걱정했지만, 고용관계에서 생기는 강제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가 언제든 다른 직장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삼성 반도체 엔지니어에게 대안이 뭡니까. SK하이닉스 하나입니다.

사실상 둘뿐인 시장에서는 사용자 쪽에도 독점적 지위가 생깁니다. 하이에크가 노조를 노동의 독점 공급자로 본 그 논리가, 이 시장에서는 반대편에도 적용되는 거죠.

하이에크 자신의 기준으로도, 여기는 자유로운 계약 상황이 아닙니다.

여쭙습니다.

정의를 빼고 보면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이 결과는 어떤 규칙에서 나왔습니까.

미리 알려져 있었습니까. 모두에게 같았습니까. 나중에 소급되지 않았습니까.

셋 다 아니라면, 누가 옳았느냐를 따지기 전에 물어야 할 게 따로 있는 것 아닐까요. 규칙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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